이 태 묵

지난 어린이날, 어버이날, 그리고 스승의 날, 무슨 선물을 받으셨습니까?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부담되지 않고 서로 마음이 통했을 때, 선물의 가치는 높아지게 됩니다. 그런 선물이 없었다면 얼마나 허무했겠습니까? 하지만 5월의 잔치는 그저 내 한 몸 성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지난주 토요일 날 밤 sbs의 스타킹이 그랬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데 사랑할 수 없는 몸. 얼마 살지 못할 생명을 눈앞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노래이야기를 가슴속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가슴에 “나는 엄마다” 명찰 달고, 휠체어에 탄 채 출연한 사람은 41세 변혜정씨. 두 아들의 엄마이자 남편의 여인이기 전에 한 어머니의 딸이었습니다. 점점 근육에 힘이 빠지게 되는 증세로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희귀한 병, 중증근무력증이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그런 몸으로 방송에 나온 이유가 궁금했죠.

그의 마지막 소원이 방송무대에 서 보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8년의 세월을 병원에서 TV만 보고 지내다가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작정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이크를 대는 순간 활짝 핀 얼굴로 변하더라고요. 검은 빛 얼굴이 사라지고 병이 다 나은 것처럼 말입니다. 금방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모든 패널들도 힘찬 격려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10살, 12살), 그리고 그녀, 서로 환한 웃음을 나눈 건 아주 오랜만이라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더군요. 방송분위기는 점점 달아오릅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자 갑자기 시선이 집중됩니다.

누굴까요. “남편? 아들? 아니고요. 이 자리에 있는 연예인, 가수 은지원”이라는 거예요. 놀라는 기색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히트곡 없는 가수지만, 세상을 굴하지 않고 계속 같은 음악만 부르는 가수라 좋아하고 있다” 해서 모두가 안심하는 분위기가 되더군요.

그 더듬적거리는 목소리가 오히려 잘난 채 하는 프로급 보다 더 좋았습니다. “히트곡 없는 가수”라는 한마디입니다. 은지원을 꼼짝 못하게 했으니까요.

함께 노래까지 합니다. “오오오 오오 내게 돌아와 줘, 오오오 오오 날 버리지 말아줘, .... 남아있는 감정의 찌꺼기 까지 모두 쏟아내는 순간, 은지원도 울고, 두 아들과 남편도 울고, 사회자 패널 모두가 울더군요. 이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는 세상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둘째아이 승원이 에게 “남자는 우는 게 아니야” 라고 타이르는 장면도 감동적입니다.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여인이 이루지 못한 사랑한 남자주인공에게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니야” 라고 한 영화처럼, 러브스토리의 한 장면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더욱이 가슴을 찡하게 한 것은 힘겨워하는 그가 제작진의 만류에도 세상의 엄마들에게 드리고 싶다는 말입니다.

“공부, 물론 잘 해야죠. 그러나 건강하게 살아 갈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아이들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밝은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엄마의 품” 이라고 말한 후, 다시 몰려드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퇴장하면서 방송은 끝납니다만 많은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서있는 심정 어떻겠습니까? 병마와 싸우는 동안 가정도, 가진 것도, 자존심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슬픔의 힘이라고 합니다만, 슬픔의 힘을 만들 수 없는 어려운 저런 몸을 하고 방송에 나갈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남편과 두 아들 앞에서 가수 은지원을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었던 용기나 노랫소리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남들처럼 따뜻한 밥을 못 먹이고, 행복한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 못한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고백하고 용서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두 아들로부터 “나는 엄마다” 라는 것도 간절하게 인정받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나이로 볼 때 두 아이를 낳자마자 병은 시작되었고, 엄마 노릇 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엄마다” 어디서 소리 한번 못 질러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이야기를 통해 본 그는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의 엄마였습니다.

방송이 가져다 준 한 장면이었지만, 이런 일들은 화제성으로만 그칠 일이 아닙니다. 억지로 흥행을 만들어 대는 여느 프로그램과는 달랐습니다. 한 가정의 불행을 있는 그대로 의연하고 침착하게 고통의 산을 넘어가는 이야기지로 끝나지만, 결코 남의 이야기될 수 없습니다.

유구의 농촌마을에도 올해는 노인잔치를 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니까요. 매년 5월이면 푸짐한 선물 사들고 마을회관까지 찾아오던 아들, 며느리가 못 온다는 연락 때문입니다.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고향에 계신 늙으신 부모님들은 늘 자식의 건강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정처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몸이 건강해야 일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고, 사랑도 듬뿍 나눌 수 있는 게 현실입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아프게 되면 행복은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깨진 아버지사랑은 새로 만들어 가면 되지만, 엄마품은 하늘나라에서나 느껴 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카네이션은 한낮 풀잎일 수밖에 없고, 효잔치는 부질없는 짓에 불과 할 겁니다. 가정의 달 5월의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슬픈 이야기는 싫습니다. 잘 차린 잔치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가장 큰 선물은 자신의 건강 아닐까요. 자신 있게 “나는 엄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강 말입니다.
/ 유구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