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덕 수

온 사방이 꽃이다. 출근길 아침까지만 해도 가로의 벚꽃이 망울져 있었는데 오후 들어 꽃망울이 한꺼번에 터졌는지 온통 새하얗다.

겨울 내내 소나무 등 일부 나무를 제외하곤 마치 죽은 것처럼 숨죽어 있던 나무와 풀이 되살아나고 있다. 버들가지 끝은 약간 붉은 기운이 도는 살색이 되더니 며칠 만에 잎망울이 터져 요즈음은 연초록 이파리들이 땅을 향해 늘어져 있다.

근래 들어 가로, 마을, 아파트, 동산 등에 좋은 꽃나무를 많이 심어 봄부터 가을까지 꽃구경이 볼만하다.

꽃구경 중에 으뜸은 벚꽃이다. 둥치로 보면 꽤 늙은 벚나무인데 하얀 꽃을 마음껏 화사하게 피운 걸 보면 경이롭다. 활짝 피어있는 벚꽃을 자세히 보면 연한 분홍색이 돈다. 우리네 정서상으로는 잠시 한 순간은 몰라도 너무 진한 것은 부담된다.

색도 예외가 아니다. 진하게 빨갛게 핀 철쭉 보다 수줍은 듯 보일 듯 말 듯 모퉁이에 핀 연분홍 진달래꽃에 정이 더 간다. 연분홍 진달래가 피는 봄날엔 이 노래가 생각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이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는 작사가인 손로원이 1953년에 만드셨다고 한다. 이 곡의 가사는 우리나라 시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노랫말로도 유명하다. 봄만 되면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부를 수 있는 국민가요 중의 하나이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이 노래가 얼마나 우리나라 사람들 정서에 잘 맞았는지 작년에 작고하신 백설희를 비롯하여, 조용필, 한영애, 장사익 등 우리나라 최고의 소리꾼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나는 처음 이 노래를 장사익의 노래로 들으면서 애끓는 애절함에 숨 넣어 갈 듯한 절창이 좀 도가 지나친다고까지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작사가 정두수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을 읽고는 내 생각이 바뀌었다. 이는 그냥 지어낸 대중가요가 아닌 듣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불효자가 부르는 사모곡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1945년, 화사한 봄날인데도 금강산의 계곡물은 차가웠다. 상복을 입은 손로원이 어머니 묘소에 무릎을 꿇었다. 젊은 나이에 홀로된 어머니가 로원이 장가드는 날 당신이 열아홉 살 시집오면서 입었던 그 연분홍 저고리와 치마를 입는다고 한 말을 지키지도 못한 채 돌아가신 것이다.

그 후 9년간 간절한 사모의 정을 품다가 6.25전쟁 막바지에 이 곡을 만들게 된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우리는 가끔 울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찬란한 봄날도 계절이 바뀌면 잊고 기억하지 않듯이, 할머니가 된 어머니에게도 열아홉 시절 연분홍 치마를 입고 봄바람에 뽐내던 찬란한 봄날이 있었던 걸 자식들은 끝내 눈치 채지 못한다. 왜 자식들은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화사한 봄날 울 엄마, 백발이 된 엄마에게 시집올 때 입었던 그 연분홍치마를 못 입혀 드리고 만 것일까. 후회하지만 이미 봄날이 금방 가버리듯 엄마도 어느 날 꽃이 지듯 하루아침에 가버리셨다.

4월 중순 계룡산 산신제를 보러 가는 길이다. 길가에 벚꽃과 진달래꽃이 활짝 폈다.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들으며 간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사실 나는 슬픈 상황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릴 줄 모른다고 집사람한테 가끔 한마디씩 듣곤 한다.

하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각박해진 것은 눈물 흘리는 것에 대해 너무 인색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손로원은 노래한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어야 한다.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운다.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었다. 즉, 이렇게 즐거울 때 함께 웃고 슬플 때 서로 울다가 가는 것이 진짜 참 인생인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봄이 오는지 가는지 꽃이 피고 지는지 제대로 꽃 한번 쳐다 볼 수 없는 듯 쫓기는 삶을 살아간다.

봄이다. 산과 들로 나가자. 꽃을 보며 먼저 간 어머니, 할머니를 사모하며 눈물을 흘려 보자.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자연을 중시했다. 왜냐하면 사람의 진정한 정은 산과 들의 경(경치)에서 정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물이 메마른 사람은 우선 자연을 사랑하고 이해해야 한다. 눈물이 나지 않는 당신이여, 그대는 세상을 삭막하게 사는 것이다. 그대들 이 찬란한 봄날이 가기 전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연분홍 치마를 입고 봄나들이 가자.
/ 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문화연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