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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은 왕궁터가 아니다"
[권인주 기고]정방뜰이 더 유력...궁궐지 설계로본 백제
[974호] 2011년 01월 11일 (화) 14:16:21 권인주 webmaster@e-gongju.com
   

산성공원이 궁터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권인주 향토사학자(전 금성여고 교사)는 공산성은 왕궁터가 아니라 정방뜰이 더 유력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궁궐터는 평지가 일반적인데 공산성은 산지이며, 또한 군신이 거주할 공간도 없고 대궐을 수비하는 군사들이 거주할 터전도 없다는 주장이다. 왕은 막강한 권력자인데 집무실과 생활터전 조차도 들어설 수 없는 곳에 궁터를 조성할 이유도 가치도 없다고 밝혔다. 이에 본지는 권인주씨의 주장을 게재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편집자 주

웅진백제와 사비백제 궁궐지의 기본설계
1. 웅진 백제 궁궐지의 기본설계

①웅신전(곰사당) - 도면에서 궁궐의 우측(서쪽)에 웅신전을 세웠다. 웅신전을 세운 이유는 수신제의 근원인 용왕신을 통하여 ‘수신이여 대궐을 보호하소서’이다.

②종묘단(사당)- 궁궐의 좌측에 사당을 세운 후 매일 분향하면서 ‘대궐을 보호하소서’이다. 이 종묘단은 원래 백제 미지의 왕의 묘당이었는데 묘당이 퇴락하였기에 이전하여 향교를 지었다(공주군지 737쪽). 이 터전에는 국궁장(활쏘는 곳)이 운영되고 있다. 환언하면 공주의 기관장과 유지들이 웅진백제의 왕릉과 사당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격이고 참으로 비통한 참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③무령왕릉과 고분 - 궁궐과 종묘단의 직선인 정 동쪽에 왕릉이 있다.

④천산(두리봉 또는 서혈산) - 궁궐의 정 남쪽에 있는 산(주산)으로 웅진백제 때엔 천신숭배가 행해졌던 신령한 천산이었다. 웅진백제는 도읍지를 배치함에 있어서 4개의 혈(기맥)처인 요청에 궁지를 낙점하였다. 이 4곳의 혈점(혈처)은 동혈사(의당면), 남혈사(금학동), 서혈사(웅진동), 북혈사(연미산)이다.

⑤무령왕릉과 5호분, 6호분 - 무령왕과 왕비, 지석과 5호분과 6호분은 천신숭배의 산인 두리봉산(서혈산)을 향해 안장되었다. 대부분의 산소는 머리가 산의 위를 향하고 매장되는데 무령왕은 다리가 산위를 향하여 안장되었다. 거꾸로 안장된 형상이다. 이러한 장례의 특성으로 판별하면 5호분과 6호분은 왕릉이 된다. 5호분은 삼근왕릉, 6호분은 동성왕릉, 7호분은 무령왕릉이 된다. 웅진천도를 이룬 문주왕은 사냥을 나가서 시해된 후 오늘의 능티고개(금학동)주변에 매장 되었다고 사료되며 능선을 넘으면 능암사가 있다.

⑥금성산 - 공주와 부여에는 똑같은 이름인 금성산이 소재한다. 금성은 왕을 상징하는 산으로 필자가 제시하는 대궐의 정 동쪽에 금성산이 나타난다.

⑦왕릉의 비교 - 공주는 금성산의 남서방향에 왕릉이 있는데 부여는 대궐과 금성산의 동똑에 왕릉이 소재한다.

⑧동성왕 때의 연지와 임류각 - 이 연못은 동성왕 22년에 건설한 연못이다. 현재는 산성공원의 북녘인 금강변에 소재하는데 50평 정도로 작고 20m 정도로 깊고 초라하지만 이 연못이 동성왕이 건설한 연지라고 칭한다. 이러함에 필자가 추적하고 조사한 방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공주시 웅진동에 오래 거주한 노인과 지역민이지적한 일부 지역 이름이 동지뜰이다. 깊은 수렁논인데 이곳은 원래 공주에서 검상리가는 옛길 옆이다. 동지뜰 즉 동성왕이 건설한 연못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태봉하면 왕실의 태가 묻힌 산이고 능산하면 능이 있는 산이다. 이러하므로 동지뜰 즉 동성왕 때의 연못과 일치한다. 또한 부여의 궁남지(서동요의 설화지)는 부여의 궁궐에서 정남쪽에 나타나는데 공주의 동지뜰(연지)도 공주의 궁궐의 도표에서도 정남향이며 천산인 두리봉과 궁궐의 직선상에 나타난다.

환언하면 공산성에 소재한 연지와 임류각은 각각 50평 정도인데 이정도 규모인 누각과 연못이 삼국사기에 기록될 정도인가와 가치가 있는가?하고 묻고 싶다. 이에 필자는 산성공원에 소재한 연지와 임류각을 지정한 사학자가 정신나간 사람이 아닌가 한다.

필자가 탐사한 동지뜰인 연지는 만 평이 넘는 곳이고, 인접한 곳이 웅진도독부 터이고 일명 소정뜰이라고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부여의 궁남지도 몇 만평의 규모였다고 기록한 부여군지의 기록으로 보아도 그 규모가 예견된다.

동성왕 22년 봄 궁성 동쪽에 임류각을 지으니 높이가 다섯 길 이었다. 또 못을 파고 기이한 것들을 기르니 신하와 간관이 상소하고 항의하였으나 더 간하는 자가 있을까하여 궁문을 닫아버렸다.(삼국사기 430쪽)

이러한 기록으로 판별해 보면 50평정도?연못과 누각을 건설했을 때에 상기한 사건이 발생했겠는가 단연코 아니다. 몇 천평 그 이상인 몇 만평의 대규모 공사라고 예견할 수 있다. 도한 임류각과 연지는 붙어있어야 하는데 공산성 내의 연지는 금강가이고 임류각은 능선을 넘어서 조성했으니 사리와 상식에 어긋났으며 조잡한 연지보다는 붙어있는 금강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 또한 임류각지의 주춧돌은 공주목 지도에서는 망일사지로 나타난다.

부여와 공주에서 백성들의 생활 터전은 궁성에서 보아서 남서 방향이므로 부여는 구룡뜰이고 공주는 우성뜰인데 부여의 군지는 구룡뜰이라고 기록하였는데 공주는 기록이 없다. 다만 우성뜰 남쪽에 우성과 옥성이 있고 북녘으로 연미산과 무성산성이 있다. 현재의 우성벌판을 보지말고, 금강의 하상이 10m 깊었던 1천년전의 곰나루와 우성벌판으로 판별하기를 바라고 있다.

⑨웅진교 - 동성왕 20년에 건설하였다.(삼국사기) 이 다리는 원래의 곰나루(팽나무있는 곳)와 평목리를 연결했던 다리로 백성의 터전이던 우성뜰과 연결되었다. 이 길이 서쪽에서 공주로 오던 원래의 길로 하고개를 통하여 공주시내로 들어왔었다.

⑩산성공원이 궁터가 될 수 없는 이유

·궁궐터는 평지가 일반적인데 공산성은 산지이다. 또한 군신이 거주할 공간도 없고 대궐을 수비하는 군사들이 거주할 터전도 없다. 왕은 막강한 권력자인데 집무실과 생활터전 조차도 들어설 수 없는 곳에 궁터를 조성할 이유도 가치도 전연없다.

·동성왕 13년 웅천의 물이 넘쳐 왕도의 집 200여채가 물에 잡겼다는 기록인데 산성공원은 산이므로 물에 잠길 곳이 한 군데도 없다.

·동성왕 10월 단을 만든 후 천지에 제사지내고 남당에서 군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인데 공산성의 궁지 남쪽에는 남당의 터전이 전연없다.

·무령왕 10년 제방을 튼튼히 하고 21년은 홍수가 나서 900여 집이 달아났다이다. 산성내에는 백성의 터전이 없고 수해를 입을 곳도 없으며 제방도 필요없는 곳이다.

⑪곰나루지역이 궁지인 이유

·좌표를 통한 궁지의 혈맥이 정연하다.

·홍수로 인한 200여채의 침수지역이고 제방을 튼튼히 했다는 기록과 900여채의 집이 달아났다는 무령왕때의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공주군지의 기록을 보면 왕궁지가 3곳인데 산성공원, 곰나루지역, 산성동의 구터미널 지역이다. 3곳 중 곰나루 지역이 가장 넓고 부근 지역명도 왕골, 오얏골이며, 왕릉의 사당도 이곳에 있다는 점이다.

·당나라가 세운 웅진도독부 터전도 곰나루 지역이었다.

2. 사비백제 궁궐지의 기본설계

①백마전 - 부여에서는 백마전의 흔적도 근거도 없다. 그러나 백마강이라는 이름과 당나라장군인 소정방이 부소산 북녘인 조룡대에서 백마를 미끼로 용을 잡았다는 기록과 공주의 취리산에서 백마를 잡은 후 그 피를 입에 바르고 항복의 글인 취리산 회맹문을 금판과 철판에 새겼다. 즉 백마는 사비백제의 기상이며 수호신(수신)이었다. 또한 궁남지(서동요)의 포룡대인 정자는 애를 밴 용이고,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을 잡았고 백마의 피를 입에 바르고 항복문서를 작성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조약이 아니고 백제의 기상과 이상을 깔아뭉개면서 멸시와 조소를 하였고, 백제민의 가슴에 쇠못을 박았다. 이러하므로 부여의 조룡대의 사적지 이름과 공주의 취리산(업보로 끌려가 사는 뜻)의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 공주와 부여의 궁성설계가 일치하므로 백마전은 재건되어야하고, 부여의 수호신인 용의 제사도 행해져야 한다.

②정림사지와 오층석탑- 사지와 오층석탑은 부여시내의 중심부에 소재하는데 오층석탑은 일명 평제탑이라 불리운다. 즉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의 승전기념탑인 것이다. 탑의 네면에 승전 장군들의 이름과 침략 이유를 새겨놓았다. 필자의 도표에서 공주아 부여가 일치하므로 정림사지와 오층석탑이 있는 곳은 종묘단(사당) 터전이다. 왕국지는 파낸 후 연못을 만들었고 사당은 정림사라는 사찰로 바꾸었다. 그 근거로 정림사는 백제 멸망 이후에 나타난 사찰이라는 부여군지를 근거로 하였다.

③금성산 - 왕을 상징하는 산이다. 공주는 금성산의 서남방으로 왕릉을 조성했으나 부여는 금성산의 정동쪽에 왕릉을 조성하였다.

④부여왕릉- 부여의 왕릉은 도표와 같이 백마전(수진제), 왕궁과 종묘단(정림사) 금성산의 직선상인 정동쪽에 소재하며, 왕릉은 조석산 남역이 넓은 터전이다. 이 터전은 새 조 글자로 새가 날개를 편 모습이며 새는 천사를 상징하면서 승천의 뜻이 담긴 산이다. 이 왕릉의 정서쪽에는 왕릉을 관리하고 매일 제사하는 사당이 있었는데 금동향로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며 이곳은 파헤쳐져서 연못이 된 곳이기도 하다.

⑤궁남지 - 이 연못은 공주에서도 나타나는 동지뜰(연지)과 같은 선상이며 서동요의 무대이다. 주궁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 또는 별궁이라 한다. 원래는 3만평 규모였으나 1965년~1967년에 지금의 크기로 축소되었다. 이 연못 중앙에 섬을 만들고 정자를 세웠는데 포룡정(잉태한 용)이고 공주에서는 임류각이 되는 셈이다.

⑥천산 - 부여의 천산은 계룡산과 칠갑산이다. 정북향인 칠갑산을 주산으로 하고 숭배하였다. 그 근거로 천산의 위치인 정북향인 규암면 호계리에 천정대지가 있다. 이곳엔 정사암이라는 바위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재상을 뽑는 중요한 의례를 거친 후 왕이 인사를 결정했다는 바위인데 이곳에 호암사가 있었던 것이다.

⑦구룡벌 - 이곳은 사비백제 군민의 터전인데 현재는 입구에 외리와 내리가 있으며, 부여시내의 서남향이다. 서남쪽은 하늘의 땅으로 공주에서는 우성뜰에 해당된다.

⑧조룡대 - 부소산 북녘인 금강변에 소재한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을 잡았다는 곳이다. 백제의 기상이며 수호신인 백마와 용을 통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자신의 위용을 기리고 백제의 기상과 정기를 꺾었다는 뜻을 통하여 백제를 조롱하고 있는 현장이 지금고 조룡대로 불리고 있다는 점이 참담하고 통탄하다. 우리말로도 ‘조롱대’ 즉 ‘조롱하는 곳’이니 더욱 그러하다. 공주에서도 취리산은 업보 때문에 끌려가는 산으로 불리면서 당나라에 끌려간 의자왕과 만 명이 넘는 인질을 끌고 간 그때의 통한을 어찌할 것인가? 낚시 조(釣)를 놀 유(遊)로 바꾸어야 한다. 즉 용이 노는 곳이어야 한다.

⑨사비백제의 도성을 반월성이라 했다. 사비백제의 궁지를 부소산의 끝인 구석으로 몰고 쪼그라트린 곳이 일본학자와 그 때 공부한 자들이 지적한 궁지이다. 참으로 어이없고 통탄할 일이다. 필자가 탐사하고 조사한 바로는 부여시내 모두가 궁성이고, 구드레에서 부여방송지국까지가 내성이었고, 군수리와 대왕벌까지 뻗은 곳을 외성으로 하며 합하여 반월성이 되는데 부소산 동쪽인 청산성과 남쪽인 중정리 소재의 대왕초등학교까지 연결하면 반월이 된다. 이름하여 반월성이다.

3. 상기한 도표를 통하여 공주와 부여의 왕국지 기본설계가 일치하고 있으며 금강을 반원형으로 나타난 지형도 일치하고 있다. 풍수상의 길지는 강을 뒤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내세의 안식과 현재와 미래의 융성과 풍년이고 재물의 풍성을 의미한다. 또한 물을 쉽게 이용하면 농경에 유리하고 초목과 동식물이 풍요로운 대길지의 터전이기도 하다.

백제는 강원도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도 제주도 중국의 동부와 일본지역까지 관활하는 대제국이었다. 이에 백제민은 선조들의 대명이 무엇인지 자각하고 통탄의 패망의 역사를 밝히고 재건의 기초를 다지는 길을 만들어야 된다고 부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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