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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932호] 2010년 02월 01일 (월) 10:40:46 김도석 공주여고 교사 webmaster@e-gongju.com

  

   

김 도 석

  올망졸망한 산들이 키 재기 하듯 빙 둘러 서 있고 양지 녘에는 역시 산들의 모양을 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고 밤이면 얕은 산등성이로 수많은 별들이 내려와 새벽까지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하늘로 돌아가는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의 동쪽으로‘전골’이라는 계곡에서 사철 맑은 시냇물이 돌돌돌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이른 봄 얕은 냇가 기슭엔 버들가지 뽀얀 솜털이 아기의 볼처럼 부드러웠고 송사리 떼 맑은 물속에서 사람 인기척에 놀라 이리저리 숨기에 바빴다. 이어 산에 진달래 붉어질 때 개울 둑 따라 개나리가 지천으로 피어나던 동네였다.

  그 하천을 따라 넓지도 좁지도 않은 논들이 구불구불 논두렁으로 구분 지으며 계단식으로 산기슭까지 연결되어 있고 논들은 굶지 않을 정도의 쌀을 동네에 공급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온 볏짚은 초가집 지붕으로, 곡식을 말리는 멍석으로, 온갖 물건을 묶을 수 있는 새끼로, 소의 먹이로 버려지는 것 없이 철저히 이용되었다. 겨우내 소에게 먹이기 위해 집집마다 ‘골배미’라는 논에 볏짚 낟가리 쌓아두고 있었고 낟가리 사이사이는 동네 꼬마들의 좋은 아지트가 되어주었다.

  이 볏짚 낟가리 속에서 동네 조무래기들은 전쟁놀이도 하고 숨바꼭질도하고 어른 흉내 내느라 담배도 몰래 피워보곤 했었다.

  이 시냇물은 흘러‘널펀지’라고 부르던 만(灣)으로 흘러 들어갔는데‘소대미’라고 부르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만이 동네 앞까지 마치 표주박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 만의 가장자리에는 4개 마을이 조상 대대로 보리 고개가 닥쳐도 걱정 하나 없이 살 수 있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논이 되었다가 쓰레기 매립장이 되었지만 바닷물과 시냇물이 만나는 이곳에는 민물장어가 흔했고 문조리(망둥어), 전어, 까지명(경상도사투리)이라는 물고기들이 많아 낚시하기가 쉬웠다. 낚싯대도 동네 뒤 대나무 밭에서 보기 좋게 똑바른 대나무 쪄다가 끝에 실을 묶고 낚시 바늘 묶어 갯벌에서 잡은 갯지렁이 끼어 바닷물에 던지면 심심치 않게 물고기가 잡혔다.

  봄철 마당에는 암탉이 국국거리며 갓 부화한 병아리들 데리고 두엄더미 파헤쳐서 지렁이 찾아주고 심심한 수탉은 힘자랑하듯 힘찬 날갯짓과 꼬끼오 소리로 적막한 고요를 이따금씩 걷어내고, 뒷산을 혼자 쏘다니다가 집에 돌아온 멍멍이가 하릴없이 고양이를 쫓아다니고 다급해진 고양이 감나무 위로 도망쳐 나무위에서 내려다보며‘메롱’거리는데 뒤쫓던 개는 올려다보며 고개 갸웃거리고 있었고 마굿간 토담위에는 염소가 되새김질하며 이 광경을 처음부터 할아버지 손주 재롱 보듯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마당가 텃밭에는 지난 가을에 심은 마늘, 양파들이 물이 올라 싱싱하게 자라고 상추가 제법 손바닥을 펼친다. 희고 노란 장다리꽃이 울타리처럼 텃밭 가에 빙 둘러 있고 꿀을 따느라 분주한 꿀벌들이 윙윙거리며 분주하던 풍경이 아련하다.

  그러던 농촌마을에 언제부터인가 불기 시작한 산업화 바람이 젊은이 들을 하나둘 도회지로 데리고 가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돈을 벌어야한다며 눈에 돈독이 올라 있었고 시골에 남아 있으면 장가도 못 간다고 아들들을 부산으로 서울로 올려 보냈으며 급기야 우리 집도 70년대 초반에 이 이촌향도의 물결을 탔다. 그리고 전답을 다 팔아도 집한 채 사기가 버거워 지금의 광명시 소하동 그린벨트지역에 낡은 집을 한 채 사서 10명의 가족이 한집에서 살았다. 방이 네 칸인 한옥이었는데 그나마 두 칸은 인근 공장에 다니는 공돌이 공순이(당시는 비하의 의미로 노동자들을 이렇게 불렀다)들에게 세를 놓고 방 한 칸에서 큰 형 부부와 어린 세 명의 조카가 쓰고 나머지 방에서 아버지, 어머니, 형, 나, 누나 다섯 명이 썼다.

  당시 농사짓는 사람은 공부를 못하고 능력이 없어 그런다고 생각했다. 농사짓는 사람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소위 말하는 공돌이 공순이였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갈 수 만 있으면 도회지로 몰려 나갔고 특히 명절날 귀향한 공돌이 공순이를 따라 도회지로 나갔다. 그 무렵 차츰 동네 인심도 변해갔는데 사람들이 돈을 알면서부터 인심이 사나워지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도회지로 나간 이 들은 도시빈민이 되었고 아주 드물게 자수성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노동자나 농사짓는 농부나 그 살림이 그 살림이었고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사회적 약자 층에서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 후로 난 교사가 되었고 내가 자란 고향에 대한 향수를 지병처럼 때로는 앨범처럼 가지고 살아간다. 난 지금이라도 힘에 부치지 않을 정도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현재 농촌에서 산다는 것은 몸이 부서질 정도의 노동을 감당하지 않으면 자식 키우며 살아갈 수가 없다. 세계화시대에 쌀시장마저 개방되어 버렸다. 정부에서도 이미 농업은 포기한 산업으로 생각한다.

  옷은 매일 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밥은 매일 먹어야 한다. 그것은 먹거리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농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FTA자체도 마뜩찮지만 FTA조항에 농사보조금 금지 조항이 있어서 보조를 못한다면 복지제도의 확충은 어떨까 무상교육, 무상의료, 노인연금 정도의 복지가 행해지면 내 먹을 정도의 농사만 짓고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데….

  대한민국 살벌하다. 도덕성보다는 몇 푼의 돈이 더 가치롭다고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지난 대선 때 섬뜩하리만큼 명징하게 증명되었다. 그립다 인간냄새가…그리고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시골에서 자연과 벗하며 욕심없이 농사짓고 봄나물에 보리밥 한 공기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공주여고 교사·전교조공주지부 부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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