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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칼 럼 ]
[942호] 2010년 04월 19일 (월) 16:12:39 공주신문 webmaster@e-gongju.com

이 문 하

  액션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흔히 서로 겁나게 총질해대거나 생사를 가르는 아슬아슬한 사투 끝에 주인공과 그 애인은 살아남는다. 결국 죽는 자들은 악당들이고, 살아남는 자는 정의롭거나 선한 사람들이다. 영화에서는 선과 악이 생과 사를 가름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도둑, 사기꾼, 강도, 교도소의 죄수, 성직자, 스님, 잘난 남자, 예쁜 여자, 부자, 빈자, 권력자, 장애인 등등 모든 남녀노소는 물론, 모든 동물과 모든 식물에 이르기까지 살아있는 존재들이 동시에 생명을 잃었다. 다름 아닌 핵폭탄이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된 결과였다. 길이 3m, 지름71cm 밖에 안 되는 작은 폭탄이 폭발하자 히로시마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 하나님도 무심하지…….‘집단 죽음’으로 완벽한 평등이 이뤄졌다. 하늘의 절대자는 없었다. 사람이 만든 핵폭탄 아래서 선과 악은 전혀 구별되지 않고 모두 죽었을 뿐이다. 염라대왕의 명을 받는 저승사자들도 어찌할 수 없었는가 보다. 최근 신문보도에 의하면, 당시 저승사자를 대신하여 원폭을 투하하였던 미 공군 소위 모리스 젭슨씨가 지난 3월 30일에 미국 로스앤잴리스에서 향년 87세로 숨졌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은 비교적 합리성을 추구한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서양의 기독교가 급격히 침체(우리나라는 예외)되고 교회와 교인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든 까닭 중에 하나가 바로‘핵폭탄 아래 평등한 죽음’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힘들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숫자’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죽음에 관한 슬픔은 온전하게 전이될 수 있지만, 백사람의 죽음이 백배의 슬픔으로 증폭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비극적인 사건일지라도 통계숫자는 허망할 뿐이다. 사람은 단지 숫자로는 좋은 놈, 나쁜 놈을 일일이 구별하면서 감정을 변곡시킬 능력은 없는가보다.

  올해가 안중근의사 서거 100주기이다. 지난 100년간 우리는 역사의 질곡 속에서 6·25전쟁과 수많은 사건으로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한 사람의 죽음은 소설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역사’라는 말이 있듯이 안중근 의사의 죽음은 소설로 재구성되었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우리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되었다.

  안중근 의사와 동시대에 살았던 최악의 매국노 이완용은 68세 나이로 천수를 누리다 갔다. 그의 삶은 화려했다. 내각총리 대신으로 최고의 권세를 부렸고, 권력욕과 재물욕을 한껏 누렸으며, 한때 학문과 서예에 심취하여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인정받았으며 제명대로 살다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았다. 그의 장례식은 고종황제 못지않게 호사스럽고 화려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해피앤딩이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죽으면 그만이지 죽은 뒤 뭘 알겠는가?’라고 흔히 말한다. 대지진으로 한꺼번에 수천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허망스럽다. 하늘에 계신 절대자는 선한 자와 악한 자를 죽음으로 가려내는 일에 도통 간여하지 않는 듯하다. 안중근 의사의 삶은 정의로웠으나 고생하면서 짧게 살다 가셨다. 이완용은 매국하면서 권세부리며 호강하고 천수를 누렸다. 죽으면 그만이지 죽은 자가 뭘 알겠는가? 그러나……. 이 말속에는 무언가 불공평하고 허망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의 명확한 평가는 그 사람의 관에 못질이 끝난 뒤부터 이뤄진다고 한다. 그렇다. 한 사람의 죽음 이후의 일은 신의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일본인들마저 감동시킨 안중근 의사는 31세까지 고달프고 짧게 살다가 형장의 이슬이 되었지만, 그는 세월이 갈수록 우리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완용은 죽은 뒤 역사의 냉혹한 심판을 받았다. 그의 묘소는 전북 익산군 낭산면에 있었는데 끊임없이 의로운 사람들의 훼묘사건이 발생하자 그의 손자들이 파묘해서 없애버렸다. 그의 가족과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거나 돌팔매를 받았고 그의 직계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굴욕과 불행한 삶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요즘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 보면, 베스트셀러 목록 1위부터 30위까지 주로 법정스님의 저서들로 꽉 차있다. 산사의 고요함 속에서 귀 기울이면 풀씨가 터져 흩어지는 소리까지 들린다는 법정스님의 글귀가 기억난다. 그렇게 청정한 산 속에서 사시던 분이 하필이면 폐암에 걸린 사실이 불공평하다고 생각되지만, 사람들은 스님의 사후에 더욱 스님의 글을 탐독한다. 그 이유는 돈과 지위와 욕망을 쫓아 질주하는 오늘날 우리네 삶이 더 이상 피폐해지고 허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자꾸자꾸 마음을 비워내고 싶어서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침몰된 천안함 사고현장에서 살신성인 정신으로 순직한 한주호 준위에 대한 수많은 이들의 깊은 애도도 그의 죽음을 허망하지 않게 해주었다. 이제, 천안함 선미에서 46명의 실종된 젊은이들과 유가족들에 대한 보훈의 여지는 살아있는 자들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몫이다. 우리 모두를 허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전)공주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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