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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께서 눈바람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실줄이야…”
거란 피해온 현종, 공주절도사 김은부 극진 도움으로 7일간 공주 몽진
[938호] 2010년 03월 22일 (월) 18:29:57 이영주 기자 -20ju@hanmail.net

 딸 3명 아내로 맞아 보답, 향토문화연구원 1000년 기념비 건립 방침

   
고려 현종 공주 방문 1000년을 기념하는 학술회의가 열리고 있다.

  공주시와 공주향토문화연구회(회장 최석원)가 주최하고 한국중세사회학회(회장 박종기)가 주관하는 ‘고려 현종 공주 방문 1000년 기념 학술회의’가 3월19일 오후 1시30분부터 공주대 신관캠퍼스 본관 3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회의는 전남대 김당택 교수의 ‘고려 현종과 공주에 대한 총론’및 △한남대 이정신 교수의 ‘고려 초기의 공주사회, 지방세력과 민의 동향’△숙명여대 홍영의 교수의 ‘현종의 공주 몽진 배경과 의의’△연세대 이정훈 교수의 ‘현종대 정치와 대외관계’△한국교원대 이병희 교수의 ‘현종대 사상과 문화정책’△대전대 김갑동 교수의 ‘현종의 혼인과 김은부’란 주제발표가 진행된 데 이어 종합토론이 있었다.

  이에 본지는 이날 대전대 김갑동 교수의 주제발표를 토대로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재위 1009∼1031)이 공주를 방문하게 된 배경과 공주의 김은부의 세 딸과 왜 혼인했는지, 아울러 김은부와 현종의 밀착이 고려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됐는지 등을 살펴본다.
/편집자 

현종과 김은부 

   
김갑동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고려의 제8대 임금 현종은 어떤 사람이고 공주와 어떤 인연을 맺었을까?

  김갑동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의 주제발표에 따르면 고려의 제8대 임금 현종(1009∼1031)은 모진 고난을 겪으면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즉 그는 어린 시절을 아버지와 같이 현재의 경남 사천 지역인 사주에서 자랐다. 개경으로 올라온 후에는 천추태후의 미움을 받아 사원에서 살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직후에는 거란의 침략을 받아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 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여러 지방을 두루 여행했으며 공주와의 인연도 거란의 침입으로 인한 피란(避亂) 당시에 이뤄지게 됐다.

  특히 공주절도사였던 김은부(金殷傅)의 도움을 받아 몽진(蒙塵) 생활에서의 어려움을 잊기도 했다.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현종은 김은부의 세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이는 파격적인 조치로 그 때까지 한 사람에게서 3명의 딸을 후비로 책봉한 예는 없었다. 이 외에도 그는 총 13명의 후비를 맞아 많은 외척을 갖게 됐다.

  당시 왕실의 혼인은 대개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뤄진 경우가 많았고 실제로 외척 세력이 정계에 등장해 정치를 좌우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다면 현종은 왜 김은부의 세 딸을 후비로 맞이했을까. 거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이에는 다음 기록이 참고된다.

 『김은부는 수주 안산현 사람이니 성품이 부지런하고 검박했다. 성종 때에 견관승으로 임명됐다가 목종 때에 어주사가 됐고 현종 초년에 공주절도사가 됐다. 왕이 거란군의 침공으로 인해 남쪽으로 피난가던 도중, 공주에서 머물렀더니 김은부가 예의를 갖추고 교외까지 마중 나와 말하기를, “성상께서 험한 산천을 지나시며 찬서리 눈바람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실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리까?”라는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옷과 허리띠, 지방 특산물을 바쳤다. 왕이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호종 관리들에게 물건을 나눠줬다. 왕이 파산역에 이르니 역의 아전들이 모두 도망가고 식사조차 드리지 못하게 됐는데 김은부가 또 반찬을 장만해 조석으로 왕에게 식사를 바쳤다. 그 후 거란군이 철퇴하고 왕이 국도로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공주에서 유숙했는데 김은부가 맏딸을 시켜 왕의 의복을 지어 바쳤다. 이것이 인연이 돼 그의 딸이 궁으로 들어 가게 됐으니 그가 바로 원성왕후이다. 원혜, 원평 두 왕후도 역시 그의 딸이었다(‘고려사’권94 김은부전).』

 『원성태후 김씨는 안산 사람이니 시중 김은부의 딸이다. 덕종, 정종, 인평왕후, 경숙공주를 낳았다. 처음에 현종이 남녘으로 피난갔다가 거란 침략군이 퇴각한 후 돌아오는 도중에 공주에 이르렀을 때 김은부는 절도사로 있었다. 김은부가 그의 딸을 시켜 왕의 의복을 지어 드리게 하였더니 이로 인해 그를 맞아 들여 연경원주라고 불렀다. 그가 현종 9년 7월에 정종을 낳으니 왕이 연경원을 연경궁으로 고치고 사절을 보내 예물을 줬다. 현종 13년 9월에 김은부에게 ‘추충수절창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사공 상주국 안산군 개국후 식읍일천호’를 줬으며 죽은 모친에게는 안산군 대부인을 추증했다. 또 이내 후를 왕비로 책봉했다. 정종 15년에는 또 조부 김긍필에게 ‘상서우복사 상주국 안산현개국후 식읍식읍일천오백호’를 추증했으며 죽은 조모에게 안산군 대부인을 추증했다. 외조부 이허겸에게 ‘상서우복사 상주국 소성현개국후 식읍일천오백호’를 줬다. 정종 18년 9월에 왕후가 살던 옛집의 택호를 장경궁이라고 했다. 그가 정종 19년(1028) 7월에 죽으니 시호를 원성 왕후라고 했으며 명릉에 매장했고 현종의 사당에 합사했다. 덕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태후로 추존하고 후에 용의공혜라는 시호를 추가했다. 문종 10년 10월에 영목이라는 시호를 주고 후에 또 양덕신절순성이라는 시호를 추가했다. 인종 18년 4월에는 자성이라는 시호를, 고종 10년 10월에는 광선이라는 시호를 추가했다(‘고려사’권88 후비전1 현종 원성왕후 김씨조).』

현종 보살핀 대가로 딸 후비돼

  이처럼 현종이 거란의 침략을 받아 남쪽으로 피난갈 때와 돌아올 때 잘 보필한 대가로 그의 딸이 후비가 됐음을 알 수 있다.

  현종은 원래 목종의 옹립으로 왕이 됐다 할 수 있으나 그 과정에서 강조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러자 거란은 강조의 정변과 목종 시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침략을 해왔다. 현종은 강조로 하여금 이를 막게 했으나 패하자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됐다. 현종이 피난간 목적지는 전라도 나주였다. 현종은 개경을 출발해 양주∼광주∼비뇌역∼사산현(충남 직산)∼삼례역(전북 삼례)∼장곡역∼인의역(전북 태인)∼수다역을 거쳐 노령을 넘어 나주로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현종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경기도 광주에 있을 때 강화를 청하러 간 사신 하공진 일행이 거란 병영에 구금됐다는 말을 듣고 시랑 충숙, 장연우, 채충순, 주저, 류종, 금응인 등을 제외한 여러 신하들이 놀라고 겁이 나서 왕을 버리고 뿔뿔이 도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현종, 공주 웅진나루서 시 읊어

  장곡역에 유숙할 때에는 전주절도사 조용겸 무리의 공격을 받기도 하는 등 고초를 겪으면서 현종이 공주에 도착했다. 현종은 웅진 나루를 건너 공주로 들어왔다. 당시 상황을 다음 자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웅진도는 주(州)의 서쪽 7리에 있으며 적등진의 하류이다. 고려 현종이 거란을 피해 남쪽으로 달아나니 절도사 김은부 등이 이 나루에서 맞았다. 현종이 시를 짓기를, “일찍이 남쪽 땅에 공주가 있다고 들었더니 선경(仙境)이 영롱하여 길이 있었구나. 이러한 마음 즐거운 곳에 이르러, 군신(群臣)과 함께 모여 일천 시름 놓아본다”하였다. 송사에 이르기를, “거란이 강조를 잡아 죽이니 왕순이 평주로 달아났다”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17 충청도 공주목 산천조).』

  김은부가 웅진 나루에서 현종을 맞이하자 현종은 시를 읊어 잠시 시름을 잊었던 것이다. 현종이 공주에 들어오자 김은부는 정성을 다해 새로운 옷과 허리띠, 그리고 지역 특산물을 바쳤다. 파산역에 이르렀을 때도 고을 아전들이 다 도망해 식사를 하지 못하게 되자 김은부가 나서 식사 준비를 해 들게 했다.

  돌아올 때에도 현종은 공주에 들렀다. 나주를 출발한 현종은 복룡역∼고부군∼금구현∼전주∼여양현(충남 여산)을 거쳐 공주에 오게 됐다. 현종은 편안한 마음으로 공주에서 6일 동안이나 머물렀다. 이때에 김은부가 그의 맏딸을 시켜 어의를 새로 지어 바쳤다. 이후 현종은 청주를 거쳐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현종은 김은부의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그 맏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니 그가 바로 원성왕후 김씨였다. 그 후 2명의 딸을 더 후비로 들였다.

지방의 지배자 공주절도사

  그렇다면 현종이 김은부의 세 딸을 후비로 맞은 것이 오로지 피난시의 후의 때문이었을까? 여기서 당시 김은부의 직책이 공주절도사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래 절도사는 중국에 있었던 관직명이다. 중국의 삼국시대에 오나라의 손권이 군량의 운반과 총괄을 담당하는 관으로서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다. 그 후 당 나라 예종 때인 685년 변경에 설치했으며 얼마 안가 전국의 도와 몇 개의 주에 이 관직을 설치했는데 일명 번진이라고도 했다. 절도사는 그 휘하에 절도부사·행군사마·판관 등의 요속을 두고 관내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했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허관이 됐고 원대에 폐지됐다. 결국 당 나라 때의 절도사는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고 있어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김은부는 성종 때에 견관승(종6품∼정9품)이라는 낮은 관직에 있었고 목종 때에는 어주사로 있었다. 어주사라는 관직이 정확히 어떤 일을 관장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명칭으로 보건대 왕이 드시는 음식을 관장한 직책으로 생각된다. 왕의 측근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때 그는 목종이 현종을 옹립할 때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공으로 그는 공주절도사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공주절도사로 있을 때 현종을 도와 준 대가로 그 딸이 후비가 돼 그도 출세가도를 달리게 됐다. 개경으로 돌아온 직후 현종은 그를 중앙으로 불러 형부시랑(정 4품)에 임명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현종은 거란 임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그를 거란에 파견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 래원성에서 거란의 사주를 받은 여진에게 붙잡혀 갔다 몇 년 후에 돌아왔다. 고려를 대표하는 사신이 됐으니 현종의 신임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현종 6년 5월 김은부는 지중추사가 됐고 현종 7년에는 호부상서(정 3품)가 됐으며 그해 6월에는 중추사(종 2품) 상호군이 됐다. 그러다가 그는 현종 8년(1017) 4월에 죽었다.

   
학술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김은부 가문 영화 이어져

  그러나 김은부 가문의 영화는 당대에 끝나지 않았다. 그의 외손자가 계속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즉 김은부의 딸 원성태후 김씨와 현종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현종의 뒤를 이어 덕종과 정종이 됐다. 또 원혜태후 김씨의 아들이 정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됐던 것이다. 그들은 또 근친혼을 통해 더욱 공고해진 세력을 과시했다. 덕종은 제3비로 효사왕후 김씨를 맞이했는데 그녀는 현종과 원혜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는 배다른 남매간의 결혼이었다. 문종은 또 제1비로 현종과 원성태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인평왕후 김씨를 맞이했다. 이 역시 이복 남매 간의 결혼이었다. 순종도 김은부의 후손과 결혼했다.

  김은부에게는 아들도 있었는데 큰 아들은 김충찬으로 중추사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작은 아들은 출가해 경덕국사가 됐다.

외척 세력의 등장

  결론적으로 현종은 13명의 후비를 맞이했다. 이는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후비 수이다. 이는 자신의 지지 세력이 미약하였던 현종이 외척으로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특히 성종의 인척을 종실에서 3인이나 후비를 들이었으며 김은부의 딸 3인을 후비로 맞은 것도 독특하다. 이는 전례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가고 올 때 김은부가 도와준 대가였다.

  또 공주절도사로 병권을 가지고 있었던 김은부의 군사력에 의지하고자 한 측면도 있었다. 이 때문에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온 후 김은부를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절도사제는 폐지했다. 개경에 올라온 김은부는 형부시랑으로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거란의 사주를 받은 여진에게 붙잡혀 몇 년간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중추사(종2품)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김은부의 등장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나 태조 왕건과는 관계가 없는 새로운 외척 세력의 등장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문종대에 와서는 김은부의 처가인 인주 이씨가 새롭게 등장했다. 김은부의 처남 이한의 아들 이자연이 문종에게 3인의 딸을 납비함으로써 오히려 김은부 가문보다 더 위세를 떨치게 됐다. 그런데 외척으로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김은부의 활약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따라서 김은부의 활약과 그 대가로 세 딸이 현종비가 된 것은 안산 김씨 김은부 가문은 물론 인주 이씨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현종 대 김은부의 부상은 결국 인주 이씨의 등장을 가져 왔고 고려 전기 귀족 사회로서의 특징을 표출하게 된 의미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현종, 인조 기념비 건립된다

  한편 이번 학술회의를 주최한 공주향토문화연구회는 현종의 공주방문 1000년을 기념해 그의 피란지였던 나주 현장답사를 계획하고 있는 것은 물론 현종 기념비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아울러 1624년 2월 이괄의 난으로 서울이 함락한 상태에서 피란해 공주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던 조선 16대 인조임금의 기념비 건립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공주향토문화연구회는 70여명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시민 모금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최석원 공주향토문화연구회장은 “이들 임금은 내우외환의 위기 가운데서 나라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했고 또 공주와의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며 “특히 현종의 공주 방문 1000년을 기념해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용혁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그동안 고려역사는 학계에서도 미처 손을 못 댄 부분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번 현종 기념비 건립을 통해 고려에 대한 역사학적 의미, 불교문화의 발전, 정림사의 재건 등을 부각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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