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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꽃
[칼럼]
[958호] 2010년 09월 06일 (월) 13:05:52 공주신문 webmaster@e-gongju.com
  이 걸 재 

   1970년대 한가로운 시골의 여름밤 정자나무 아래 밀대방석을 깔고 모깃불을 놓고 마을 어른들이 모여 앉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남녀간에 내외의 풍습이 남아 있어서 정자나무 아래 좋은 터에는 남자 어른들이 앉아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낙네들이 모였습니다. 농촌에는 선풍기조차 귀하던 시절이라서 삼복더위가 아니더라도 흔히 볼 수 있던 정경이었지요.

  아직 어린 티를 면치 못했던 저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모두 들리는 곳에 앉았습니다. 혹간 어른들이 옛날이야기라도 하는 날이면 귀동냥으로 듣는 이야기의 재미가 쏠쏠했던 때문입니다.
그날 밤 아주머니들의 화재는 꽃이었습니다. 남자 어른들은 칠월 멍석이라 하여 농번기 중에 농한기인 여름에 삼태기나 멍석을 짜고 가을 추수에 쓸 새끼를 꼬는 등 일을 하는 분위기였으니 자연스럽게 여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 집 울안에 핀 맨드라미며 손톱에 물을 들일 봉숭아꽃으로 시작된 아낙네들의 꽃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시집오기 전 친정 마을의 꽃 이야기가 되었지요. 시내에서 시집온 아낙은 산성 공원에 피는 벚꽃을 자랑했고 부잣집에서 시집온 아낙은 친정집 마당에 피던 목단을 회상하면서 가난한 집으로 시집오고 나니 꽃구경은 고사하고 마당가에 꽃을 가꿀 여력도 없는 팔자를 한탄했습니다. 분위기가 침울할 때 쯤 아래 지역에서 멀리 시집온 여인이 동백꽃 이야기로 분위기를 바꾸었습니다. 눈 속에서도 꽃이 피는데 그 꽃이 곱다는 자랑이었지요.

  목련, 수국, 매화, 무궁화, 메밀꽃.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져 슬그머니 재미가 없다고 느낄 때입니다. 말없이 삼태기를 짜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영국이 아버지가 한마디 했습니다.
“이 꽃 저 꽃 해야 베꽃만큼 이뿔라구.”
그 한마디에 꽃 타령에 들떠있던 모든 여인들이 일순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벼꽃이라는 말에 동의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벼꽃

  벼꽃. 이이야기를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제가 그때가지 벼꽃을 본적이 없어서입니다. 그랬습니다. 저는 눈만 뜨면 벼가 자라는 논을 바라보지 않고는 살수 없는 마을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영국이 아버지가 한 그 말을 듣기 전에는 벼에 꽃이 핀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해마다 날마다 벼를 보고 자랐는데 벼에도 꽃이 핀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세고 으악스럽게 살아가는 어른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이 벼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날 나는 벼가 막 패기 시작하는 논에를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때마침 벼꽃이 필 시기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벼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다는 꽃이 제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벼꽃은 언제 피느냐고. 그리고는 어른의 손에 이끌려 막 팬 벼의 이삭 그중에서도 작은 낫 알에 아주 작게 핀 벼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아름답기는커녕 자세히 바라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초라한 꽃이었습니다. 색이 곱지도 않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꽃을 왜 영국이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꽃이라 했으며 그 많은 아주머니들은 왜 그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 했을 까요.

  풍년 득신이 농부님들에게 기쁨이 되기를 

   농사를 짓는 농부님들이 사용하는 말 중에 “득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벼꽃이 피어 수정이 완료되는 기간 즉 꽃이 피었다 지는 기간을 이르는 말입니다. 벼의 작황과 기온에 따라 3일에서 5일 동안 벼꽃이 피는데 자기 논에서 자라는 벼가 몇일 동안 벼꽃을 피우는지를 관찰하여 3일 득신 5일 득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농사를 짓는 기간 중에 이 기간의 날씨나 농사 조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우는 말이지요.

  이런 까닭에 “제 논에 득신도 모르는 놈”이라는 말은 농사꾼의 자격이 없다는 말로 쓰이고 “득신 때 논에 나가지 않는 놈”하면 천하에 없이 게으른 사람을 지칭합니다.
다행히 보통 농사를 지은 우리 고장의 올해 득신 일기는 참으로 좋았습니다. 앞으로 일기가 좋다면 논농사의 풍년은 약속된 셈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각종의 언론매체를 통해 들려오는 소식은 참으로 우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풍년이 들어도 쌀이 넘쳐나 쌀값이 폭락할 것이라는 소식으로 인해 농부님들을 우울하게 하는 것이지요.
차라리 큰 흉년이 몇 년 들어서 사람들이 쌀 귀한 줄을 알아야 농부님들이 귀한 줄 알 것이라는 푸념을 들어야 한다는 것처럼 가슴 아픈 일이 또 있을까요.
이제는 풍년 득신이 농부님들의 기쁨이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공주시공공시설관리소 공연기획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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